5.16 군사정변과 박정희 정권의 시작 (1961~1972)
5.16 군사정변과 박정희 정권의 시작 (1961~1972)
1960년 4.19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출범했지만, 자유민주주의 회복의 기대와 달리 정치·경제 상황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권위주의적 통치를 무너뜨린 후 등장한 장면 내각은 이상과 달리 분열된 정치 구조와 미흡한 경제 정책으로 국민 불만을 해소하지 못했습니다. 실업률 상승, 치안 불안, 그리고 부정부패가 여전히 사회 전반에 만연한 가운데, 군 내부에서는 ‘국가 재건’을 명분으로 정치 개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역사적인 5.16 군사정변을 감행하게 됩니다.
정변의 배경
제2공화국의 내각책임제는 권력 집중을 막는 장치였지만, 실제로는 효율적인 정책 집행을 방해하는 구조적 한계가 있었습니다. 각 부처 장관과 국회의원들은 당리당략에 치중했고, 정부의 결정을 신속하게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장면 내각은 재정 건전성 확보를 이유로 적극적인 경기 부양을 주저했고, 그 결과 실업률은 높아지고 청년층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군 내부에서는 한국전쟁 이후의 복구 과정에서 정치와 군사 영역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일부 장교들은 정치 무능과 부패를 국가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군이 직접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정희는 한국전쟁 당시의 전투 경험과 군사교육을 통해 뛰어난 조직력과 결단력을 인정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경제 발전과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소장 이하 장교들로 구성된 혁명 주체 세력을 규합해 쿠데타 계획을 세웠습니다.
5.16 군사정변의 전개
1961년 5월 16일 새벽, 쿠데타군은 한강 다리를 넘어 서울로 진입했습니다. 주요 정부 청사, 방송국, 통신시설, 경찰 본부가 신속히 장악되었고, 정변 세력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가재건’을 선언했습니다. 당시 서울 시민들은 무력 충돌에 대한 불안 속에서 하루를 시작했지만, 큰 유혈 사태 없이 정변이 마무리되면서 군부의 권력 장악은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장면 총리는 정변 당일 새벽, 쿠데타군의 움직임을 파악했으나 별다른 저항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결국 정치권은 순식간에 무력화되었습니다.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최고 권력 기구로 개편되어 입법·행정·사법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게 됩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통치
박정희 의장을 중심으로 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군정(軍政)을 선포하고, 정당 활동과 정치 집회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고위 관료와 정치인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숙청이 이루어졌고, 언론 검열과 출판 통제도 강화되었습니다. 반공 이념은 국가 운영의 핵심 기조로 자리 잡았으며,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 속에서 안보 정책이 최우선 과제로 부각되었습니다.
하지만 군정은 단순히 권위주의적인 통치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국가 경제를 근본적으로 재건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이를 위해 구체적인 장기 경제계획을 수립했고, 외자 도입과 산업 기반 확충을 국가 차원에서 추진했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작
1962년, 박정희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합니다. 목표는 농업 중심의 저생산 경제 구조에서 벗어나, 산업과 수출 중심의 경제로 전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사회간접자본 확충, 기간산업 육성, 수출 장려, 외자 유치 등의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특히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경제협력자금(청구권 자금)을 확보했고, 미국, 서독 등 서방 국가의 차관과 원조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건설, 울산공업단지 조성 등 한국 산업화의 초석이 되는 사업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가 형성되었고, 삼성, 현대, LG와 같은 기업이 급성장했습니다.
민정 이양과 정치 복귀
1963년, 박정희는 국제사회의 압력과 국내 여론을 의식해 민정 이양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군복을 벗고 민주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어 합법적인 국가 원수로 복귀했습니다. 이후 1967년 재선에 성공하며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의 정권은 경제 성장과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했고,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억압, 언론 통제, 중앙집권적 행정 구조가 고착되었습니다. 하지만 경제 성과와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성장은 국민들의 상당한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유신체제로 향하는 길
1970년대 초반,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공식화할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상했습니다. 국내외 정세의 불안정, 특히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와 냉전 구조를 이유로 ‘안정된 국정 운영’을 내세웠습니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헌법을 개정하는 유신체제를 출범시킵니다. 이로써 그의 권력은 절대화되었고, 5.16 군사정변으로 시작된 군사정권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마무리
5.16 군사정변은 대한민국의 정치사를 크게 바꾼 사건이었습니다. 군부의 정치 개입은 민주주의의 중단을 의미했지만, 동시에 급격한 산업화를 가능케 한 경제 개발의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박정희 정부가 남긴 유산은 경제 성장과 권위주의라는 상반된 평가 속에서 오늘날까지도 뜨거운 논쟁의 대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