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태와 제5공화국의 성립 (1979~1981)
10.26 사태와 제5공화국의 성립 (1979~1981)
1979년은 유신체제의 균열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된 해였습니다. 장기 집권을 이어오던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성장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사회 곳곳에서 불만과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특히 정치적 억압과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반발이 고조되면서, 전국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 현대사를 뒤흔든 궁정동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시대의 종말을 알렸을 뿐 아니라, 이후 신군부 집권과 제5공화국의 출범으로 이어지는 정치 격변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부마민주항쟁과 유신체제의 흔들림
1970년대 후반,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의 끝자락에서 국제 경기 침체와 2차 오일 쇼크 등 외부 충격에 직면했습니다. 물가 상승과 실업 문제는 심화되었고, 경제 성과에 가려져 있던 사회 불평등과 노동 착취 문제도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유신헌법을 통한 장기 집권과 긴급조치 발동이 이어지며, 국민의 기본권은 크게 제한되었습니다.
이러한 불만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폭발했습니다. 학생과 시민들이 주도한 부마민주항쟁은 반유신 시위의 전국적 확산을 촉발했으며, 정부의 강경 진압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반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일부 참모들과 정보기관 내부에서도 유신체제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궁정동에서 벌어진 총성 – 10.26 사건
1979년 10월 26일 저녁, 서울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그리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참석한 만찬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회의 주제는 부마민주항쟁 사태 이후 정국 수습 방안이었지만, 차지철은 강경 진압을 주장했고, 김재규는 정치적 유연성을 요구했습니다. 회의는 점점 격렬해졌고, 결국 김재규는 준비해 온 권총을 꺼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을 사살했습니다.
김재규는 이후 체포되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결단을 내렸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단순한 정치적 살인으로 판결했습니다. 이 사건은 곧바로 ‘10.26 사태’로 불리며 전 국민에게 충격을 안겼습니다.
권력 공백과 12.12 군사반란
박정희 대통령 사망 직후, 헌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군 내부에서는 이미 새로운 권력 구도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정호용 등 신군부 세력은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며 군 지휘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를 12.12 군사반란이라 부르며, 실질적으로 신군부의 권력 장악이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1980년 봄의 정치 격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정치 활동은 전면 금지되었고, 야당 지도자 김영삼은 가택연금, 김대중은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해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특히 광주에서는 시위가 대규모 시민 항쟁으로 발전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며칠간 시청, 방송국, 도청 등을 장악하며 자치 질서를 유지했으나, 신군부는 특전사와 공수부대를 투입해 무력 진압을 감행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으며, 이 사건은 이후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큰 상처이자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제5공화국의 성립
광주 진압 이후 신군부는 권력을 공식화하기 위해 헌정 질서를 재편했습니다. 1980년 8월,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곧 제5공화국이 출범했습니다. 1981년 3월에는 새 헌법(8차 개헌)을 공포하여 대통령 간선제와 7년 단임제를 규정했습니다.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 구현’을 국정 목표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언론 통제, 정치 탄압, 비판 세력 제거 등 권위주의적 통치가 이어졌습니다.
10.26 사태의 역사적 의미
10.26 사태는 18년간 지속된 박정희 체제를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진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제5공화국의 출범은 권위주의 체제가 여전히 공고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시기는 민주주의의 좌절과 더불어,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에너지가 축적된 시기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