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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도 '수능'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 소과와 대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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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도 '수능'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 소과와 대과 이야기

“조선시대에도 수험생들이 밤새 공부했을까?”
“양반이 되려면 시험 몇 개나 통과해야 했을까?”

요즘 대한민국 청년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수능’.
그런데 알고 보면, 조선시대에도 수능처럼 인생이 걸린 시험이 있었습니다.

바로 소과와 대과, 조선의 과거시험 제도입니다.

시험 한 번으로 신분이 바뀌고, 인생이 달라지던 시대.
오늘은 그 조선판 수능 시스템을 자세히 살펴볼게요.

 

조선시대 과거시험 장면. 전통 복장의 선비들이 나무 책상에 앉아 붓으로 시험지를 작성하고 있고, 주변에는 관리들이 지켜보며 감독 중.


🎓 조선의 과거제도란?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관리를 뽑기 위한 국가공인 시험제도입니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벼슬길(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출신 신분을 넘어서 양반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통로였죠.


🪜 소과와 대과? 뭐가 다른데?

조선의 과거시험은 2단계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구분설명비유하자면
소과(小科) 예비시험. 성균관 입학 + 대과 응시 자격 부여 수능 또는 1차 시험 느낌
대과(大科) 본시험. 합격 시 바로 관직 등용 공무원 최종 면접 또는 국가고시 느낌
 

📘 소과 – 조선판 '수능' 같은 예비시험

소과는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로 나뉩니다.

구분내용
생원시 유교 경전 이해력 평가 (암기력 중시)
진사시 글쓰기 능력 평가 (논술/작문 중심)
 

둘 중 하나만 합격해도 성균관 입학 + 대과 응시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 매년 전국 수천 명이 응시했지만,
합격자는 단 100명 내외! 경쟁률은 수십 대 일 수준이었다고 하죠.


🏛 대과 – 합격하면 곧바로 벼슬!

소과를 통과한 사람만 응시 가능한 고급 시험입니다.
3단계로 나뉘며, 각각의 시험은 다음과 같아요:

  1. 초시(初試): 지역 예선
  2. 복시(覆試): 한성에서 중앙시험
  3. 전시(殿試): 왕 앞에서 최종 시험 (일종의 면접 + 작문)

👑 전시 합격자는 왕이 직접 순위를 매겨 등급을 정했습니다.
1등을 ‘장원’이라 불렀고, 장원급제는 조선 최고의 영예였죠.


⏰ 시험은 얼마나 자주 있었을까?

시험 이름시행 시기
소과 3년에 1번 (향시 + 회시)
대과 3년에 1번 (식년시), 간혹 특별시험 추가
 

🧠 얼마나 어려웠을까?

  • 생원시는 유교 경전 암기 & 해석
  • 진사시는 한문으로 긴 글쓰기 (논설문)
  • 대과는 글짓기, 경전 해석, 시 짓기 등 고난이도

시험지는 대부분 한문으로 출제되었고,
답안도 한문으로 손글씨로 써야 했습니다.
현대 수능보다도 정서적·체력적 부담이 클 수 있었죠.


💡 시험 합격하면 뭐가 달라졌을까?

항목소과 합격자대과 합격자
지위 성균관 유생 관직 진출 가능
특권 양반 대우, 과거 준비 기회 고급 양반 + 실권 보유
사회 인식 지식인 성공한 엘리트
 

✍️ 재미있는 사실 하나!

  • 정약용은 진사시에 합격해 소과 출신이었고,
  •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출생 신분 때문에 과거 응시조차 못한 인물이었죠.
    → 이처럼 과거시험 자체도 ‘응시 자격’ 제한이 있었습니다.

✅ 마무리 정리

  • 조선의 ‘수능’은 소과(생원시, 진사시)
  • 진짜 관직으로 가는 문은 대과(초시 → 복시 → 전시)
  • 시험 하나로 신분·지위·미래가 모두 바뀌는 시스템
  • 지금과 마찬가지로, 시험은 조선 청년들에게도 엄청난 압박과 기회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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