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한반도의 분단과 미소 군정기 (1945~1948)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마침내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외세에 의해 분할되며 새로운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해방 이후 1948년 정부 수립 전까지의 미소군정기와 한반도 분단의 과정을 살펴봅니다.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시작
광복 직후 한반도는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일제의 통치는 갑자기 사라졌고, 새로운 정부나 행정체계도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일본의 항복 직후,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나누어 각각 남과 북을 점령하게 됩니다. 이 조치는 1945년 8월 15일에 있었던 포츠담 회담 이후, 급히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1945년 9월, 소련은 북한 지역에 진주하며 즉각 행정 통제를 시작했고, 미국은 9월 8일 인천항을 통해 진주하여 ‘조선주둔미군사령부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을 통치하게 됩니다. 이 시기를 우리는 흔히 ‘미소 군정기’라 부릅니다.
남과 북의 체제 분화
미군정은 처음에는 조선인들의 자치정부 수립을 지원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만 점차 민정 이양의 필요성을 느끼며 다양한 정치세력과 접촉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좌익과 우익 세력은 강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미군정은 반공 우익 세력과 손을 잡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김구 등 기존의 독립운동가들이 미군정의 협조자로 등장합니다.
한편 북쪽에서는 소련이 직접 나서 조선공산당 중심의 정권 수립을 도왔습니다.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지원 아래 점차 권력을 장악했고, 토지개혁과 인민위원회 조직 등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해갔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와 좌절된 통일정부 구상
1945년 12월, 미국·영국·소련은 모스크바에서 ‘3국 외무장관 회의’를 열고, 한반도에 5년간 신탁통치를 시행한 뒤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합의를 도출합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국내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좌익 세력은 신탁통치를 찬성했지만, 우익 세력은 강하게 반대하며 ‘반탁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민족 전체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또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은 국민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 좌우 합작 논의는 실패로 돌아가고, 남북의 분열은 더욱 심화됩니다.
좌우합작운동과 실패
1946년, 중도 세력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대표적 인물이었고, 이들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와 민족 통일을 위해 힘썼습니다. 하지만 내부의 반발, 특히 극우와 극좌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좌우합작위원회는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해산됩니다.
이로써 조선은 좌우로 갈라졌고, 남한과 북한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입김 아래 서로 다른 체제를 구축해갔습니다. 그리고 1948년, 결국 두 개의 정부가 탄생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분단의 고착화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 아래 남한 단독으로 총선거가 실시됩니다. 이 선거는 북한이 거부하면서 남북한 동시 선거라는 목표가 무산된 결과였습니다. 이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같은 해 9월 9일에는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며 김일성이 수반으로 올라섭니다. 이렇게 해서 한반도는 하나의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국가로 갈라지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분단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마무리하며
광복은 분명 기쁨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해방과 강대국의 이해관계 속에서 한반도는 또 다른 고통의 시기로 접어들었습니다. 미소 군정기와 그로 인한 분단의 역사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주와 통일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보여줍니다. 이 시기를 기억하는 것은 단지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하는 밑거름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