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 과정 (1388~1392)
1388년, 고려는 이미 정치적 혼란과 외세의 압력, 내부 권력 다툼 속에서 국운이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위화도 회군을 기점으로 기존 왕조가 몰락하고 새로운 조선 왕조가 성립하기까지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1. 고려 말의 정치 상황
권문세족의 전횡
고려 후기, 권문세족은 원 간섭기와 공민왕 개혁 이후에도 막강한 세력을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불법 토지 겸병과 부역 수탈을 통해 경제력을 축적하며 정치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왕권은 약화되었고, 민심은 점차 멀어졌습니다.
외적의 침입
왜구의 해안 약탈, 홍건적의 침입은 고려의 방어 체계를 무너뜨렸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성계와 최영이었으며, 이들은 고려 후반의 군사적 영웅이자 동시에 정치 변혁의 주역이 됩니다.
2. 위화도 회군 (1388)
명의 철령위 설치와 요동 정벌 계획
1388년, 명나라는 요동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해 고려 영토를 편입하려 했습니다. 최영은 이에 반발해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이성계에게 4만의 군사를 맡겨 출정시켰습니다.
회군의 결단
이성계는 군사·경제적 부담과 명과의 전면전을 우려하며 ‘4불가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최영이 이를 무시하자, 군대를 위화도에서 돌려 개경으로 회군합니다.
이 사건이 바로 위화도 회군이며, 이를 통해 이성계는 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정치 실권을 얻었습니다.
3. 개혁과 권력 장악
개혁 정치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와 조준 등 개혁 세력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고 백성들에게 재분배하는 과전법을 실시했습니다. 이는 군사와 관료의 급여를 토지에서 지급하는 제도로, 새로운 권력 기반을 마련하는 핵심 정책이었습니다.
우왕과 창왕의 폐위
이성계 세력은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1388년 우왕을 폐위하고, 이어 어린 창왕마저 폐위시킨 뒤 공양왕을 옹립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군사 정권의 완성을 의미했습니다.
4. 조선 건국의 전야
명과의 외교
이성계는 명과의 외교에서 온건 노선을 택하며,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내정 안정에 집중했습니다. 이는 이후 조선 건국의 명분을 마련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신흥 사대부의 부상
조선 건국의 핵심 세력은 신흥 사대부였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정치 이념을 내세우며, 불교 중심의 고려 체제를 비판하고 유교적 중앙집권 체제를 지향했습니다.
5. 조선의 성립 (1392)
1392년, 공양왕이 스스로 왕위를 물러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며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왕조 교체를 넘어, 정치 이념과 국가 운영 체제의 대전환이었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의 근본 이념으로 삼고,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강화했으며, 토지 제도와 군사 제도를 정비했습니다.
6. 역사적 의의
고려 말~조선 건국기의 변화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닌 사회 구조의 재편이었습니다. 권문세족 중심의 귀족 체제에서 신흥 사대부 중심의 관료 체제로 전환되었고, 불교 중심의 문화에서 유교 중심의 국가 체제로 변화했습니다. 이는 이후 500년간 이어질 조선 왕조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